2013년 1월 5일 토요일

선수협과 변절

 세상의 모든 발전이 올곧은 선의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미란다 원칙은 아동 성폭행범으로부터 시작됐고, 문민정부는 박철언이 건넨 계약금 40억에서부터 준비됐다. 더구나 야구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행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더 잘 때리고 훔치고 속이는 팀이 승리하는 스포츠다. 다만 그 팀은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작은 사회이고, 팀과 팀이 모여 리그를 이루니 모든 사회가 그렇듯 필연적으로 서로간에 갈등이 있을 수 밖에 없고, 그를 해소하는 과정을 통해 발전이 있기 마련이다.

 선수협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1998년 시즌이 끝나고 삼성이 최고 연봉자 양준혁을 해태로 트레이드하자 양준혁은 이에 불복하고, 자신이 쌍방울의 지명을 거부하고 상무에 입대한 신분으로 삼성에 입단한 것은 구단과의 밀약이었으며 복무 시절 뒷돈을 받기도 했다고 폭로했다. 이후 양준혁은 다시 1년 뒤에 트레이드 시켜주겠다는 밀약을 하고 해태에서 뛰다 LG로 건너간다. 이때 부당함을 느꼈던지 선수협 결성에 앞장섰고, 중간에도 여러 문제를 일으키지만 결과적으로 선수협이라는 조직의 탄생에 큰 공을 세운다. 그리고 FA신분을 얻자 LG에 당시 FA최대액 두 배 가까이되는 36억을 냅다 부르고, 우선협상기간이 끝난 하루 뒤에 바로 친정팀 삼성과 총액 27억 선에 계약하며 날 불러주는 팀이 없었다 울부짖었는데 진위는 모를 이야기지만 하여튼 굴곡 많은 선수생활이었다는 건 확실하다.

 현재 프로야구를 이루는 세 솥발은 KBO 사무국, 가입 구단, 선수협이다. (팬은 빼도록 하자)구단은 KBO에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고, 구단과 선수는 근로기준법에 의한 고용관계가 아닌 통일 계약서에 의해 사업자와 사업자의 계약을 맺는다. 여기서 선수협과 KBO의 관계가 애매해진다. 분명 선수협은 선수들의 모임이니 KBO에 속해있는 것 같지만, 총회나 이사회엔 회원이 아니므로 참석할 수 없다. 가령 KBO는 에이전트 제도를 12년 가깝게 시행 보류 중인데, 사업자끼리의 대등한 계약을 하는데 아무리 구단이 회원이라도 KBO가 선수에게 에이전트를 끼고 계약하지 말라고 할 명분이 따로 없다. 징계 역시 마찬가지다. 선수가 잘못을 저지르면 소속 구단 외에 KBO가 상벌위원회를 소집해 출장정지 처분 등을 내리는 경우가 있는데, 물론 이는 규약에 근거가 있지 않냐 할수도 있다만 예컨대 전경련 소속 기업과 계약한 자영업자가 뭔가 잘못을 했다고 전경련이 자영업자에 영업정지 혹은 사회봉사활동 처분을 내릴 순 없지 않은가? 뭔가가 톱니가 맞지 않아 보이는 이유는 선수협은 분명 프로야구에 참여하고 있긴 하나 당사자 주체성은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2004년부터 지금까지, 메이저리그의 최저 연봉은 30만 달러에서 48만 달러까지 상승했다. 같은 기간 관중수가 240여만명에서 700만명까지 상승한 KBO의 최저 연봉은 2000만원을 쭉 유지하다 2011년 400만원 인상되는데 그쳤다. 각종 인센티브에 1군 수당까지 있기야 하지만, 30대 기업 대졸 초봉 평균보다 1000만원 정도 적은 금액이다. 이 기간 동안 평균 연봉은 약 7000만원에서 9941만원까지 꾸준히 올랐고, 최고 연봉은 7억4천만원에서 15억원까지 올랐다. KBO가 대통령이 두 명 바뀌는 내내 양극화를 추구하고 재정지출 삭감을 결의한 것은 아니고, 물가상승률 정도는 가끔씩 보전해줬을 법도 하다만 선수협이 교섭대상이 아니기에 단체협약을 맺긴 커녕 전반적인 문제를 토의하러 테이블에 같이 앉을 기회도 적었기 때문이라 봐도 무방하다.

 '선수협 뒤에 배후가 있다''사회주의적 조직이다'등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음해론과 진통을 겪고 마침내 2001년 정식으로 선수협이 출범했으나, 창립 멤버들이 이제 투쟁을 끝내고 내외로 통합의 길을 가겠다는 취지로(역시 많이 들어본 말이다) 간부직에서 물러나는 순간이 왔다. 즉시 어용 간부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창립 멤버들 나름의 성과는 있었던 것이 바로 이때 FA제도와 최저연봉 2000만원 등이 정비되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 선수협에 내려온 어용 간부가 그이상 구단의 뜻을 거스를 일도 없고, 창립 멤버들이 줄줄이 보복당하는 것을 본 선수들도 회장을 맡을 의지가 없었기에 회장직을 공석에 두고 공동지도체제(이것도..)로 유지되던 선수협은 2006년 이종범을 회장으로 선출한다만.. 06 07시즌 시원하게 망한 이종범이 선수협에 신경쓰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이 시절 각팀 주장들이 자동으로 선수협 대표가 되는 시스템을, 각자 자기 팀의 선수협 대의원을 뽑는 방식으로 바뀌긴 했다. 숫제 구단이나 감독이 직접 주장을 임명하는 팀도 있으니 유신헌법식 국회의원 지명제에서 직선제로 바뀌었다 그 정도 의미는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외의 활동은 외국인선수 쿼터 확대를 반대했고, 소극적으로 처우 개선을 요구한 것 정도일까.

 그러나 2007년말 손민한이 선수협 회장에 취임하고 강경노선을 취하며 폭풍이 불게 되는데, 지금에서야 이 시절 내부 비리들이 하나둘씩 드러나며 흑역사가 되고 있고, 현재 박재홍 회장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똥 치우느라 고생도 하고 있지만 손민한 회장 시절 강경노선으로 얻어낸 게 많은 것도 사실이다. 우선 선수들의 초상권 주체를 구단에서부터 선수협으로 옮겨와 게임회사 등과 계약하며 안정된 수익을 얻을 수 있었고, 대졸선수의 FA 자격 획득 연한을 줄였으며 09년 WBC 분배금과 관련해서도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던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여세를 몰아 손민한은 선수협을 노동조합으로 만들어 정식 교섭단체로 인정받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찬반 투표에 들어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은퇴까지 불사하겠다며 선수협 창설을 주도한 양준혁이, 이번엔 아예 선수협 노조전환 투표에 삼성 선수단을 퇴장시키는 것을 주도한 것이다. 손민한 전 회장이 반대표라도 좋으니 찬반 투표엔 참석해달라고 설득하였으나 요지부동이었다. 물론 삼성에 다시 입단하며 절대 선수협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 않겠나 예상할 수 있었지만 못내 찜찜했다. 비단 의사결정을 방해한 것 때문만은 아니다. 일전 선수협 창설 과정에서 구단의 편에 섰던 유지현과 김기태도 좋게 선수생활을 마무리하지 못한 것은 기억하지 못했는지, 자기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역시나 양준혁도 한국야구사에 길이남을 금자탑을 세워놓고도 석연찮은 은퇴-은퇴식은 화려했지만-를 했고, 이후에도 코칭 스태프 제안은 받지 못했다. 과정을 돌이켜보면 마치 도스토예프스키가 시베리아 끌려갔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극우인사로 전향한 것을 연상케하는데, 사실 이러한 형태의 변절이 일반적으로 드문 일은 아닐 것이다. 다른 형태의 변절도 있었다. 역시 선수협 창립 멤버인 M씨가 FA 거액 계약을 맺은뒤 연봉이 뛰자, 연봉의 1% 수준인 회비가 비싸다고 선수협을 탈퇴했던 일이 있었다. 그렇게 선수협을 떠난 M씨는 은퇴하고서는 '은퇴선수협' 사무총장을 맡아 월급을 받기도 했다. 기가 막히다.

 사람은 많은 이유에서 변한다. 그래서 나는 타인에 대한 시혜적 동정보다는, 공동의 목표를 세우는 것이 훨씬 강력한 연대를 만드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 연대에 불안감을 느끼는 계층이 할 수 있는 효과적이고 교활한 방안이 있다. 소작인 위에 마름 세우듯, 저렇게 몇몇에 완장을 채워주고 정당성을 만들어줘 알아서 들쑤시고 단속하고 다니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이 저럴진대 어찌할까 싶을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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